티스토리 뷰
목차
배우 안성기 별세…국민 배우의 69년 연기 인생을 마무리하다

대한민국 영화계를 상징해 온 배우 안성기가 2026년 1월 5일 별세했다. 향년 74세이다. 고인은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을 맞이했다. 아역 시절부터 시작해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영화의 흐름과 함께해 온 국민 배우의 부고 소식에 영화계와 대중 모두가 깊은 슬픔을 전하고 있다.
중환자실 입원부터 별세까지의 경위
안성기는 별세에 앞서 2025년 12월 30일 자택에서 식사 도중 음식물이 목에 걸리는 사고를 겪었다. 호흡이 막힌 상태에서 그대로 쓰러졌고, 현장에서 심폐소생술(CPR)을 포함한 응급조치를 받은 뒤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자택에서의 사고 이후 안성기는 심정지 상태로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며, 이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채 집중 치료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고, 중환자실 입원 6일 만인 2026년 1월 5일 오전 9시, 가족들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끝내 세상을 떠났다.
혈액암 투병과 건강 악화 과정
안성기는 단순한 사고 이전부터 오랜 투병을 이어오고 있었다.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고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갔고, 이후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약 6개월 만에 재발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항암치료와 회복을 반복하며 건강과 연기 활동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투병 기간에도 영화 관련 일정과 시상식, 영화제 행사에 가능하면 모습을 드러내며 현장을 지키려 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가발을 착용하고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는 장면이 포착되면서 건강 악화에 대한 우려가 깊어졌고, 동시에 끝까지 배우로서의 책임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도 드러났다.
2020년 입원 사실이 알려진 뒤로는 건강 이상설이 꾸준히 이어졌으나, 이후 인터뷰를 통해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새 작품으로 다시 관객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혀 팬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오랜 혈액암 투병과 말년의 사고가 겹치며 안타까운 비보로 이어지게 되었다.
장례 절차와 유족, 영화인들의 마지막 배웅
안성기의 장례는 영화계의 위상에 걸맞게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한국영화배우협회 주관의 영화인장으로 진행된다.
- 빈소 :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
- 발인 : 2026년 1월 9일(금) 오전 6시
- 장지 : 양평 별그리다다
장례위원회는 원로배우 신영균이 명예위원장을 맡고, 한국영화배우협회 이강섭(또는 이갑성) 이사장, 배창호 감독,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직무대행 신언식, 한국영화인협회 양윤호 이사장 등이 공동 장례위원장으로 참여한다. 한국 영화계를 함께 이끌어 온 동료 영화인들이 위원으로 이름을 올리며 국민 배우의 마지막 길을 함께한다.
운구는 후배 배우들이 직접 나선다. 한국 영화의 또 다른 얼굴로 꼽히는 이정재와 정우성이 운구를 맡아 선배에 대한 존경과 애틋한 마음을 전할 예정이다. 이는 안성기가 후배 배우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유족으로는 아내 오소영 씨와 두 아들 다빈, 필립 씨가 있다. 가족들은 투병과 중환자실 입원 기간 내내 곁을 지키며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장례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카메라 앞에 서온 국민 배우

안성기는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나, 매우 어린 나이에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영화 제작자였던 부친 안화영과 인연이 깊었던 김기영 감독의 작품 「황혼열차」(1957)에 아역으로 출연하면서 스크린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여러 작품에서 아역으로 활약하며 일찍부터 재능을 드러냈다. 특히 「10대의 반항」(1959)은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까지 주목을 받았고, 어린 배우 안성기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동성고등학교 진학 이후 한동안 연기를 중단했지만, 그 사이 아역 시절에만 약 70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을 정도로 이미 영화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남겼다.
군 복무와 대학, 그리고 성인 배우로의 복귀
고등학교를 졸업한 안성기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에 진학했다. 이후 ROTC로 군 복무를 마친 뒤에는 전공을 살려 해외에서의 진로를 고민했으나, 당시 베트남 전쟁 등 국제 정세의 여파로 뜻대로 되지 못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한계는 그가 다시 영화계로 시선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역 시절에서 한 번 끊겼던 연기 인생을 성인 배우로 다시 잇기 위해 그는 카메라 앞에 서기를 결심했고, 약 10여 년의 공백을 딛고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성인 배우로 복귀한 첫 작품은 김기 감독의 「병사와 아가씨들」(1977)이다. 이후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 행보를 이어가던 그는,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을 통해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했다.
1980년대 – 한국 영화사의 변곡점을 함께한 작품들
1980년대는 안성기가 본격적으로 ‘국민 배우’로 자리 잡아 가던 시기이다. 감독과 작품,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한국 영화의 질적 도약과 함께 걸었다.
- 「바람불어 좋은 날」(1980) – 도시 변두리 인물들의 삶을 담아낸 작품으로, 안성기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영화이다.
- 「만다라」(1981) – 임권택 감독의 작품으로, 구도자의 길을 걷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 내면과 불교적 세계관을 그린 영화이다.
- 「꼬방동네 사람들」(1982) – 빈민가 사람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사회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연기가 돋보였다.
- 「고래사냥」(1984) – 배창호 감독과 함께한 대표작으로, 거지 ‘민우’ 역을 맡아 유쾌하면서도 씁쓸한 청춘의 초상을 그렸다.
- 「칠수와 만수」(1988) – 박광수 감독 작품으로, 후배 배우 박중훈과 함께한 영화이며 한국 영화사의 상징적인 청춘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시기의 안성기는 시대 변화와 사회 현실을 스크린에 옮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관객에게는 묵직한 울림을 주는 배우로 각인되었다.
1990~2000년대 –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잡은 전성기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중반은 한국 영화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던 시기이며, 안성기는 그 중심에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는 필모그래피를 쌓아 갔다.
- 「남부군」(1990) – 한국전쟁 이후 남부군 유격대를 다룬 작품으로, 역사적 소재를 사실적으로 담아낸 영화이다.
- 「하얀 전쟁」(1992) – 안정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베트남전 영화로, 전쟁이 남긴 상처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 「그대 안의 블루」(1992) – 멜로 장르에서도 자연스러운 감정 연기를 보여주며 스펙트럼을 넓혔다.
- 「투캅스」(1993) –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코미디 형사물로, 한국을 대표하는 상업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태백산맥」(1994) – 조정래의 대하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격동의 현대사를 스크린에 담는 데 기여했다.
- 「퇴마록」(1998) – 장르적 시도를 보인 작품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한국 영화에 도전한 작품이다.
-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 강렬한 액션과 감성적 드라마를 모두 담아낸 영화로, 1990년대 한국 영화의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2000년대 이후에도 안성기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한국 영화 산업이 본격적인 대형 자본과 만나며 관객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에도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고 관객과 만나왔다.
- 「무사」(2001) – 묵직한 사극 액션물에서 존재감 있는 조연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실미도」(2003) – 한국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 중 하나로,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 「라디오 스타」(2006) – 박중훈과 다시 호흡을 맞춘 작품으로, 작은 시골 마을 방송국을 배경으로 한 따뜻한 이야기 속에서 깊은 인물 연기를 보여주었다.
2010년대 이후 – 베테랑 배우로서의 깊이
2010년대 이후에도 안성기는 작품 수가 과거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출연하는 작품마다 중심을 잡아 주는 배우로서 역할을 다했다.
- 「부러진 화살」(2012) –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사법 정의 문제를 다룬 작품에서 중심 인물로 나서며 큰 호평을 받았다.
- 「화장」(2015) – 임권택 감독과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 작품으로, 노년의 사랑과 죽음, 삶의 무게를 절제된 연기로 담아냈다.
- 「노량: 죽음의 바다」(2023) –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을 그린 영화로,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는 인물 어영담 역을 맡아 긴 세월 쌓아온 관록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아역 시절부터 말년까지 합치면 안성기가 출연한 작품 수는 영화만 기준으로 170편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르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에 참여하며, 한국 영화사 전체를 관통하는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수상 경력과 문화훈장, 예술원 회원 선출
안성기는 연기 활동에 걸맞은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1980년 「바람불어 좋은 날」로 대종상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여러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연기상을 거듭 받으며 40회가 넘는 수상 기록을 쌓았다.
국내 영화제뿐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등 해외에서도 「기쁜 우리 젊은 날」, 「하얀 전쟁」 등을 통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인정받았다.
2013년에는 대중문화예술 분야의 최고 영예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202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한 배우가 문화예술계 전반에 끼친 영향과 공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영화계와 사회를 향한 활동 – 스크린 밖의 안성기

안성기는 스크린 속 연기뿐 아니라 영화계와 사회 전반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으로서 배우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힘썼다.
- 스크린쿼터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참여해 한국 영화 보호와 산업 발전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서 오랜 기간 아동 복지와 인도주의 활동에 참여했다.
-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 등으로 예술·문화 지원에도 기여했다.
대중에게는 친근한 이미지로 오래 기억되는 광고 모델이기도 하다. 특히 커피 브랜드 맥심의 모델로 1980년대 초반부터 수십 년간 활동하며 ‘커피 하면 떠오르는 얼굴’로 자리 잡았고, 이는 그의 온화한 이미지와 겹쳐 세대에 관계없이 친숙한 배우로 기억되게 했다.
국민 배우가 남긴 유산

안성기의 연기는 언제나 사람과 삶을 향해 있었다. 시대와 세대가 바뀌어도 그의 작품들이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캐릭터를 통해 삶의 무게, 유머, 따뜻함, 슬픔을 자연스럽게 전해 왔기 때문이다.
아역 시절부터 마지막까지 스크린을 떠나지 않았던 배우, 후배들에게는 든든한 선배이자 길잡이였던 영화인의 삶은 이제 하나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과 장면, 그리고 현장에서 보여 준 태도와 정신은 앞으로도 한국 영화계와 관객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회자될 것이다.
국민 배우 안성기의 명복을 빌며, 그가 스크린 속에서 남긴 이야기들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추모일 것이다.